짝퉁이냐 중고냐 [맛있는 중고이야기]

동아일보
입력 2025년 2월 25일 10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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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버킨 35. 박스x 더스트o 레인프로텍터o, 3500으로 직거래만. 펑방지 10, 진가품 문의 사절’

중고거래에서 에르메스 버킨백 판매 글은 암호처럼 짧고, 서늘합니다. ‘여기 잠들다’ 같은 대리석 비문처럼요. 상세한 설명에 문의달라는 대부분의 글과 아주 달라요. 일종의 예약금인 ‘펑방지’ 10만원, ‘진가품 문의 사절’(또는 ‘찔러보기 금지’)이라는 말에 통장 잔고가 공개된 듯 마음이 긁히고 말아요. 확실히 에르메스 백을 당근마켓에 올리면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나봅니다. 저도 ‘오, 이 에르메스 진짜인가요?’란 말부터 나오거든요. 살 돈도 없고, 살 생각도 없는데(?) ‘진짜’인지는 알고 싶다! 문의 중에는 정품 에르메스백이라면 3500만 원에 구입하겠소, 라는 이도 있겠지만 설마 중고거래로 에르메스 거래가 되겠냐는 시비붙기도 있고, 우리 동네 에르메스 보유자가 누구인지 확인해보려는 호기심도 있을 겁니다. 버킨백은 어떻게, 카페인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진짜와 가짜, 계급과 욕망의 구조를 만들어, 우리에게 철학을 하게 하는지요.

에르메스 버킨백의 가격이 비싸다면, 대량생산이 해결책이라는 경제학도 가능합니다. 그래도 이 대담한 결정을 내린 게 어둠의 짝퉁 공장이 아닌, 미국의 대형체인점 월마트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름도 당당하게, ‘월킨백’! 버킨백과 꽤 비슷한-차마 똑같다고는 할 수 없는-‘이것’은 10만원 대에 출시돼 SNS를 휩쓸며 즉시 ‘솔드아웃’됐죠. 월킨백은 미국적이고 트럼프적이라 충격적인데, 학자들과 애널리스트들은 이것이 바로 ‘듀프 트렌드’라며 어리둥절한 저를 설득하려 합니다.

듀프(duplicated,복제)란 한 마디로 ‘품질 좋은 복제품’을 의미합니다. 미국 MZ세대의 소비 행태를 분석하며 CNN 등에서 사용했다고 하고요. 2023년 미국 시장조사업체의 보고에 따르면 MZ의 절반 이상이 ‘듀프 제품을 즐겨 찾는다’하고, 중국 SNS에선 ‘핑티(듀프)’ 검색 횟수가 갑자기 3배 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선 ‘디오르 맛’ ‘질 샌더 맛’ ‘샤넬 저렴이’가 자주 나오죠. ‘듀프’가 합리적 소비, 가치 소비를 설명하는 신조어가 된 건 글로벌 SPA에서 명품 디렉터들을 모셔다 명품 맛이 나는 상품들을 내놓고 대대적 마케팅을 벌인 결과입니다. ‘짝퉁’의 조악함과 불법성을 제거하고 고급스런 맛으로요.

듀프 트렌드의 주인공인 MZ세대는 디지털과 새로운 철학으로 중고 유니버스를 발견한 인류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의 중고거래 플랫폼(마켓플레이스) 사용자 대부분이 MZ라거나, 미국의 대표 중고거래 앱 포시마크, 우리나라 번개장터와 당근마켓 사용자의 80%가 MZ라는 보도를 많이 보셨을 거예요. 수시로 번개장터앱을 열어 더 싼 디올옴므새들백을 찾아다니는 동시에 월킨백을 사기 위해 미국 이민 간 친척에게 연락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MZ식 소비입니다. 전문가들은 듀프와 빈티지의 인기에 대해 MZ는 비싼 브랜드보다 ‘가치’있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듀프나 중고의 본질은 ‘베낀’것이거나 ‘남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어른어른한’ 명품. ‘구별짓기’를 잘 묘사하는 위수정 소설에서 주인공 제인은 당근에서 셀린 로고 풀오버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로고를 20만 구독자에게 보여주는 비용, ‘버킨30, 에토프, 2300만 원’을 사기 위한 투자로서 말예요. ‘중고로 샀는지 누가 알겠어. 새 옷을 사는 건 환경에도 좋지 않댔어(위수정, ‘제인의 허밍’)’

그러니까 가치소비란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명품의 ‘가치’를 최대한 잘 보이게, 잘 드러나게 하는 소비의 방식인 것이죠. MZ가 브랜드보다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완전한 오해라고 생각해요. SNS로 쌓아올린 ‘허세의 피라미드’ 속에서 살아가는 MZ는 그 어느 시대보다 ‘명품’이, 그것이 듀프든 빈티지든, 절실하게 필요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진짜 가치소비는 중고거래 플랫폼의 주식을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하. 전혀 저답지는 않습니다만.

@madame_carrot 당근, 고양이, 글쓰기를 좋아합니다.